디지털 기념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 여성 기금
디지털기념관 위안부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일본정부의 대응과 아시아여성기금의 설립 >아시아여성기금의 탄생과 사업의 기본 성격

 아시아여성기금의 탄생과 사업의 기본 성격

국민적인 보상 사업(atonement project)과 함께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사업도 아시아여성기금의 활동의 일환으로 정해졌습니다. 기금 중에 역사자료위원회가 설치되고 자료 수집, 간행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우선 '위안부문제' 문헌목록(교우세이(ぎょうせい) 1997년)을 출판하였습니다. 이어서 정부가 조사해서 수집한 위안부 관련 자료를 그대로 복사하는 방식으로<정부조사 '종군 위안부'관계자료수집>총5권(류케이쇼샤(龍溪書舎)출판)을 출간하였습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제일 먼저 필리핀, 한국, 대만에 대한 사업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모금액은 처음 2년간에 4억엔이 모였으나, 6년째인 2000년 8월 단계에서는 4억4800만 엔이었습니다. 그래서 기금은 중대한 결의를 가지고 2000년9월 모금활동 '캠페인2000'을 벌여 더욱 적극적으로 모금활동을 실시한 결과, 이 기간 중 약 1억1600만여 엔의 기부를 받아, 최종적으로 모금총액은 2002년 10월에 약 5억 6500만엔이 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필리핀정부가 위안부였던 여성들을 인정할 때에 전선 부대가 여성들을 연행해, 일정기간 주둔지 건물에 감금하고 연속적으로 강간을 가하였다는 방식에 대해, 위안소의 대체물, 준위안소로 인정함으로써,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들도 위안부로 인정하였다는 점입니다.

또한 대만에서 사업을 실시하는 대만의 지원단체는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을 받아들이는 것이 법적으로 정부의 조치를 요구하는 소송 제기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해달라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기금은 정부와 협의해서 1996년 10월에 '아시아여성기금사업에 관한 정부의 법적 입장'(전문은 여기)이라는 법적 문서를 받아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1996년 8월에, 한국에서는 1997년 1월에, 대만에서는 1997년 5월에 사업을 시작하고, 각각 5년간 사업을 계속하고, 2002년 9월에 종료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 각 국가지역에서 '사과금(atonement money)' 수급자는 285명에 달하였습니다.

국민으로부터 모은 성금은 약 500만 엔이 부족하여 아시아여성기금이 민간의 기부금으로 조성한 기본재산의 일부를 처분하여 그 부족분을 보충하고 총액 5억7000만 엔의 '사과금'을 피해자 분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1998년7월에 네덜란드에서는 다른 방식의 '보상 사업(atonement project)'을 실시하였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의료복지 지원사업과 일본총리의 서한을 전달하였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79명의 분들에게 의료복지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2001년 7월에 사업은 종료되었습니다.

그 외의 국가들, 중국, 북한,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등에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 국가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로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 사업(atonement project)'은 실시할 수 없었습니다.

또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방침에 따라 '위안부'였던 분들에 대한 직접적인 사업 대신에 동정부의 요청을 받아 정부자금으로 '위안부'였던 분을 포함한 고령자를 대상으로 '고령자사회복지추진'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1997년부터 시작한 이 사업은 10년간, 총 3억7000만 엔 규모로 실시하였으며, 2007년 3월에 종료되었습니다.

하라 분베이(原文兵衛) 이사장(1999년9월7일 서거)의 추억

하라 분베이 이사장

과묵하지만, 중요할 때 명확한 방침

아리마 마키코(有馬真喜子) 이사(전 부이사장)

하라 분베에 이사장을 추모하는 모임(1999년12월12일)에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이 출범된 것은 헤이세이 7년, 1995년 7월19일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년의 전기를 맞아, 전쟁 책임, 전후 책임을 둘러싼 여론이 분출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전 해부터 당시 여당3당은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를 설치하고 전후 50년의 해에 대한 활동을 위해 몇 가지 검토중이었습니다. 소위 종군위안부였던 여성들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하기 위한 '아시아여성기금'의 구상은 그 큰 골자였습니다.

구상이 발표되자 찬반양론의 여론이 분분한 가운데, 기금은 거센 물결을 헤치고 출범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금의 이사장을 맡아 주신 분이 당시 참의원의장이었던 하라 분베이 선생님입니다. 하라 의장님이 이사장을 맡으셨다고 들었을 때의 감동과 안도를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참의원 의장실에 인사하러 방문했을 때 하라 선생님은 그 온화한 얼굴로 '여러분들도 고생 많으시죠'라며 오히려 우리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1995년8월1일 기금의 첫 번째 이사회에서, 하라 이사장님은 우리들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위안부 였던 여성들의 아픔을 확실히 이해하고 , 이미 고령에 이르신 분들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지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아울러 과거를 반성하고 오늘날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침해하는 행동에도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며 기금의 방향성을 확실히 제시하셨습니다.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의 하라 이사장님에 대해 기금 관계자의 대다수가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자주 열렸던 기금의 이사회나 발기인, 이사, 운영심의회위원으로 구성되는 3자 간담회가 아무리 밤늦게까지 계속되더라도, 또한 그 후의 기자회견이 아무리 늦어지더라도 이사장님은 흐트러짐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던 점입니다. 새벽 1시, 2시까지 이어질 때도 많았지만, 이사장님은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대립점을 둘러싸고 기금의 이사회나 3자 간담회에서 격한 말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때도 이사장님은 모든 의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주셨고 그 사이에 토론은 진정되었습니다. 이사장님의 큰 존재감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우리들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기금 관계자들은 전후 보상 문제나 국가책임에 대해, 개인적으로 제각기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코 하나로 일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이후 4년여간에 걸쳐 다양한 고난에 직면하면서도 이렇게 힘을 합쳐서 일을 계속하며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라 이사장님이라는 구심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하라 이사장님은 과묵하셨지만 정작 중요할 때는 명확하게 필요한 것을 제시하시고 방침을 내주셨습니다. 제 손에는 하라 이사장님이 쓰신 한 장의 종이가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있던 초기의 이사회에 이사장이 기본방침을 제시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 사과금(atonement money)은 일률적으로 2백만 엔으로 한다
  • 실정에 맞게 개호보급(가칭)을 실시한다.
  • 위 사업은 기금설립 1년 후의 7월, 늦어도 모금 개시 1년 후의 8월15일 까지는 시작한다

이처럼 이사장님의 방침은 명확하셨습니다. 이사장님을 잃은 지금, 우리들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사장님의 지도 하에서 추진해 왔던 이 사업을 순조롭게 성실하게 계속하는 것이야 말로 이사장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장님, 수많은 지도에 감사 드립니다.

책자 '하라 분베이 이사장을 추모하는 모임'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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