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한국인 위안부의 통곡
1997년 10월29일이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저희들이 먼저 가서 다다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오셨습니다. 대단히 곱게 차려 입으시구요. 웃음기 없이, 약간 경직된 얼굴을 하고서는, 눈을 내려 깔고, 이 쪽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얼굴을 안 보면서 일이 진행되었는데, 절차에 대한 설명 등 이것저것 하고 나서 돈을 전달하기 전에 총리의 사죄의 서한을 먼저 읽었습니다. 총리의 서한을 읽기 시작하니, 그 때부터 울기 시작하시는데, 이사장의 편지 차례가 되니까, 이사장의 편지 쪽이 길었는데, 조금 더 감정이랄까 마음이 깃들어 있었어요. 그러자, 그 한국인 위안부였던 여성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말 '악'하고 소리치는 듯한, 몸의 저 깊은 곳에서 짜내는 목소리로 우셨습니다. 통곡이라고 하나요.
그래서 도중에 저도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어요. 이쪽도 충격이 커서요. 다다미 방에서 좌식탁자를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도중에 제가 건너편으로 가서, 그녀를 안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하고 함께 울었습니다. 저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꼭 안고서 다만 '미안합니다'라고 울면서 계속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엉엉 우시면서, "당신은 아무 죄도 없어요."라고 말하시더군요. "먼 데까지 일부러 와주셔서 고마워요."라는 취지의 말을 하시고는, 그래도 계속 흥분상태로 울고 있어서 한동안 서로 껴안은 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은 저한테 죄가 없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그래도 저는 일본인으로서 역시 죄가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국민의 한 사람으로, 당신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조금씩 진정이 되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남은 문장을 읽었는데, 그랬더니 굳어진 얼굴이 부드러운 얼굴로 바뀌어 있는 거에요. 뭔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바뀌었죠. 그리고 제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며 그 때부터 조금씩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시모무라 미쓰코(下村満子) 아시아여성기금 이사의 회상으로부터- |
총리대신의 사죄의 서한 등을 전달했을 때, R씨는 남편분과 함께 왔습니다. R씨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남편분은 그 때의 기분을 즉흥적으로 노래로 불렀습니다. 어떤 내용의 가사인지 물어 보자, "일본 여러분들이 제 아내에게 해 주신 친절을 잊지 않을게요. 앞으로 제가 기도할 때는 반드시 일본 여러분들의 행복도 빌겠습니다."라는 의미의 노래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S씨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한번 더 총리의 사죄의 서한을 꺼내어 천천히 다시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같은 피해자이면서 오랜 친구에게 "이제 됐지? '용서해 달라'고 여기에 적혀 있어."라고 미소 지었습니다.
L씨는, 아시아여성기금의 하라 분베이(原文兵衛) 이사장(당시)과 만나 수줍어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사실은 천황폐하의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일본에서 세 번째로 높은 분 (주: 고 하라 분베에 이사장∙전 참의원의장을 가리킴)을 만나서 사과를 받았으니까. 이걸로 됐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
저는 이번 일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금액으로, 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저는 일본 총리의 성명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1999년 6월3일).
이번 일은 제게 큰 만족감을 가져다 주었으며, 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시모토(橋本) 총리의 사죄(apology)를 평가합니다. 저는 여동생에게 보내서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쉬는 날 류마티스를 치료하러 갔을 때, 남편이 전화를 해서 이 서한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1999년 6월4일).
저는 사업금을 받고 대단히 기뻤으며, 또한 하시모토씨의 서한에도 크게 만족했습니다. 그 긴 세월을 지나 마침내 {내가 받은 피해}가 한 형태로 인정받은(recognition) 것입니다. 저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으며 심신이 떨렸습니다.귀하의 노력에 대해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1999년 6월 9일).
귀하가 저를 위해 해 주셨고, 앞으로도 해 주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금전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15세의 소녀였던 제가 받았던 그 비참함의 모든 것이 인정된 것에 대해서 입니다. 그 일이 지금도 여전히 차유되지 않고, 그것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던 그 상처의 아픔을 덜어 줄 것입니다 (1999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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