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념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 여성 기금
디지털기념관 위안부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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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여성기금 활동보고

2006년(헤에세이18년) 11월19일
전무이사 와다 하루키(和田 春樹)

'종군위안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상된 것은 1990년이었다. 미야자와(宮澤) 내각은 신속히 대응하여 1991년 12월 정부자료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피해자 16명에 대한 청취조사도 실시되었다. 그 결과가 1993년 8월4일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관방장관담화가 된 것이다. 고노 담화의 인식과 판단은 무라야마(村山)내각에서 아베(安倍)내각까지 역대내각이 계승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며, 이것이야 말로 아시아여성기금의 활동의 기본전제 그 자체이다.

위안부문제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어떤 정책으로 표현할 것인지는 무라야마내각에서 결정되어, 1995년 6월14일 이가라시(五十嵐)관방장관이 발표하였다. 위안부로서 종사하도록 강요 받은 분들에 대한 보상과 오늘날의 여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기금이 설립되게 되었다. 이사회와 운영심의회는 1995년 7월 19일에 구성되었다. 기금의 본질은 정부의 결정에 따라 설립된, 정부의 정책을 실시하기 위한 정부예산으로 운영 및 유지되는 사업체였다. 기금 내에서는 순수한 민간 자원봉사자인 발기인, 이사, 운영심의회 위원이 보수를 받는 사무국장 및 직원과 함께 활동했다.

우선 기금의 발기인에 의한 '호소문'과 무라야마 총리의 '인사말'이 1995년 8월15일 아침, 전국 6개 신문에 전면광고 형태로 발표되었다. 이 광고에서 '기금은 정부와 국민의 협력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 날 발표된 무라야마총리 담화와 아시아여성기금은 이렇게 하나로 이어졌다. 8월15일의 6개 신문 전면광고는 일본정부와 기금의, 사죄와 보상에 대한 불퇴전의 의사를 국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기금의 국민적 보상 사업(atonement project)의 형태는 1996년 9월에 정식화되었다. 우선 첫번 째 골자는 총리의 서한을 피해자 개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기금은 여기에 이사장의 편지를 첨부하기로 하였다. 두번 째 골자는 국민모금으로 사과금(atonement money)을 지급하는 것이다. 한 사람 당 200만엔으로 결정되었다. 세번 째 골자는 의료복지 지원사업이다. 이것은 정부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정부자금으로 기금을 통해 희생자들에 대해 의료복지 지원사업을 실시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 규모는 각국의 물가수준을 감안해서 결정되었으며, 한국과 대만, 그리고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한 사람 당 300만엔 상당, 필리핀에 대해서는 120만엔 상당으로 정해졌다.

기금은 모든 나라의 위안부에 대해 사업을 실시할 생각이며, 당장은 조건이 갖추어진 필리핀, 한국, 대만에 대한 사업을 생각하는 것부터 출발하였다. 8월15일 신문광고가 나온 그 날 1455만엔이 모금되었으며 연말에는 모금액이 1억3375만 엔에 달하였다. 1996년 3월에는 2억엔, 4월에는 3억엔, 6월에는 4억엔을 넘어섰다. 모금은 주로 총리 이하의 각료의 기부, 관공서의 직장모금과, 개인의 기부였다. 개인의 모금에는 대부분 위안부 희생자에게 사죄하는 국민의 마음을 글로 적은 감상이 곁들여져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돈을 내니까 정부도 보상을 위한 자금을 내길 바란다는 생각을 적어 보냈다. 모금액은 그 후는 조금씩밖에 늘지 않았으나 2000년에는 다시 캠페인을 벌여 최종 모금액은 5억6500만엔에 달하였다.

필리핀에서는 필리핀정부의 전면적인 협력을 얻었다. 기금은 광고를 내고, 신청을 접수하였다. 신청서류는 필리핀정부 사법성을 중심으로 한 태스크포스가 심사하고 확인되면 기금으로부터 사과금(atonement money)이 전달되며 필리핀 사회개발성을 통해 개개인에게 의료복지지원이 실시되었다. 국가보상을 요구하는 운동단체 리라 필리피나(LILA-Pilipina)가 고령이 된 피해자가 결단을 내려 희망한다면 그 결정을 존중해서 신청을 지원하겠다고 결정해 준것이 큰 의미를 가졌다. 필리핀에서는 신청자의 대다수가 일본군의 점령지역에서 병사에게 납치 감금되어 일정기간 계속 강간을 당하였다고 한다.

한국과 대만에서는 한국정부와 타이베이시 부원회(婦援會)가 이미 확인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사업을 실시하였다. 정부와 운동단체가 기금의 사업 실시에 반대를 하는 상황에서 사업은 비공개로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1997년 1월11일, 서울에서 7분에게 사업을 실시하였다. 대만에서는 라이 하오민(頼浩敏) 변호사가 기금의 창구를 담당해 주셔서 1997년 5월에 신문광고를 내고 신청을 하도록 알렸으며, 신청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공개로 사업을 실시하였다.
 필리핀한국대만에서의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은 예정된 사업 실시 기간인 5년이 지난 2002년 9월에 종료되었다. 이 시점에서 기금은 이들 2개국 1지역에서 285명에게 사업을 실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국민으로부터의 모금은 전액이 피해자에게 전달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1998년 7월에 의료복지 지원사업에 한정한 보상 사업(atonement project)이 실시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민간활동가에 의해 기금사업실시위원회가 구성되고, 사업의 광고, 신청접수 그리고 피해자 확인을 실시하였다. 확인된 피해자 모두에게 정부자금에 의한 의료복지지원금 300만 엔이 전달되었다. 하시모토(橋本)총리가 콕 네덜란드총리 앞으로 보낸 사죄 서한의 사본도 전달되었다. 약 90명이라고 하는 피해자 중에서 79명에게 사업이 실시되었다.

기금을 받은 피해자들은 모두 총리대신의 서한이 가진 의의를 인정하고, 오랜 고통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고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과금(atonement money), 의료복지지원, 의료복지지원금은 그나마 피해자의 생활에 도움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정부의 방침에 따라 정부자금 3억8000만엔으로 고령자복지시설을 건설하였다. 10년간 올해말까지 69개 시설이 지어졌다. 마지막해에 위안부였던 분들을 위한 고령자복지시설이 몇 건 포함된 것은 다행이었다.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사업으로 정부조사자료를 총5권의 자료집으로 출판하였다. 이 자료집은 금년말에 류케이쇼샤(龍渓書舎)의 양해를 받아 전자판이 게재될 예정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필리핀, 한국, 대만, 네덜란드, 인도네시아에 대해 보상 사업(atonement project)을 실시하였다. 그 중에서 한국, 대만에서는 위안부로 확인된 사람들의 과반수가 기금의 사업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개인에 대한 보상 사업은 끝내 실시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북한 등 앞서 기술한 국가지역 이외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업을 실시할 수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일본정부의 대처는 여전히 미해결인 부분을 남겼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금의 종료는 위안부 문제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피해자들은 지금 생애의 마지막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분들의 마음의 평안과 생활의 안정을 위해 일본정부와 국민은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금의 사업 실시가 정부와 사회의 공인을 얻지 못했던 한국과 대만에서는 기금의 종료를 맞아 기금의 사업을 받아들인 피해자에 대한 관용을 부탁드리고 싶다. 기금은 종료 후에 애프터 케어의 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정부의 새로운 지원조치가 기대되는 바이다.

위안부문제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것은 계속해서 국가의 과제이다. 기금은 디지털기념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을 인터넷 상에 개설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한다.

국제 심포지엄FINAL '12년의 총괄과 미래를 향한 제언'에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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