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은 1941년 12월, 미국령인 필리핀 루손섬에 상륙하여 바로 마닐라를 함락시키고, 1942년1월3일부터 군정을 시행하였습니다. 일본군의 군정아래서 필리핀인은 격심한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저항운동을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게릴라 토벌을 이유로 잔혹한 작전을 실행하였습니다. 필리핀에서 열린 BC급 전범재판에 기소 381건 가운데 주민학살이 138건, 강간이 45건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마닐라를 비롯하여 점령지의 각 도시에 군 위안소가 만들어져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의 위안부가 보내졌습니다만, 현지 필리핀 여성도 위안부로 강요 당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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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마닐라(지도 중-2)에서는 연합군 자료에 들어있는 경찰보고에 따르면 위안소 12채, 병사, 하사관용 5채가 있었습니다. 포로의 진술에서는 조선인, 필리핀인, 중국인 여성이 있는 위안소가 5 또는 6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북부 루손 섬에서는 바욤봉(1)(Bayonbong)에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중부 비자야스(Visaya) 지방에는 마스바테도(3)(Masbate)에 군인 클럽이라는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파나이(Panay) 섬의 일로일로(4)(Iloilo)시에는 두 곳의 위안소가 있고, 1942년에는 첫 번째에는 12명에서 16명, 두 번째에는 10명에서 11명의 위안부가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세부(Cebu) 섬의 세부(5)에는 위안소를 경영하는 일본인 업자가 한 명이 있었습니다. 레이테(Leyte) 섬의 타클로반(6)(Tacloban)에는 필리핀인이 경영하는 위안소가 있었고, 9명의 필리핀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섬의 블라우엔(7)(Buranen)에도 위안소가 1944년 8월에 설치되었습니다.
남부 민다나오(Mindanao) 섬의 부투안(8)(Butnan)에는 1942년에 필리핀 여성 3명이 있는 위안소가 개설되었습니다. 또 같은 섬의 카가얀(9)(Cagayan)에는 1943년 2월에 제3 위안소가 만들어져, 세 곳의 위안소가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같은 섬 중앙의 단살란(10)(Dansaran)에도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또 이 섬의 다바오(11)(Davao)에도 위안소가
있었고 조선인, 대만인, 거기에 필리핀인의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또한, 필리핀에세는 군 점령 지역에서 현지 부대의 군인들이 일반 여성을 강간한 뒤, 폭력적으로 납치•연행하여
주둔지의 건물에 감금하고 일정기간 연속적으로 강간을 계속한 사례도 많았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 피해자들도 위안부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성 가운데는 자신의 눈 앞에서 아버지나 남편이 살해된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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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정부의 의료•복지 지원사업 평가 보고서에서(전문은 여기로)
많은 로라(lola,할머니)들은 일본병사들에게 강제로 자택에서 연행되었다. 그 중에는 일하던 중이나 부모의 부탁으로 일을 보러 나왔다가 끌려갔던 사람도 있다. 대개는 당시 독신이었으나 기혼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콜(Bicol)에 거주하는 어떤 로라는 당시 살던 동네에 일본군인이 쳐들어 왔을 때, 집에서 자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인들은 동네 남자들과 젊은 여자들을 모아 동네 초등학교로 연행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거기에 억류시켰다. 그 후에 그 여성들은 시 청사까지 연행되었다. 또 다른 로라는 식료품을 사오라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가까운 시내에 갔다가 연행되었다. 이 밖에 말라본(Malabon)에 있는 부두 가까이에서 '시싯도(sisid, wet)'라이스 (배에서 바다로 빠진 쌀)를 건지다가 연행되었다는 로라도 있다.
로라들은 본디 시청사나 주정부 청사였던 곳, 개인의 저택, 초•중 고교의 학교건물, 병원이나 교회를 징용한 일본군의 병영, 또는 주둔지로 끌려갔다. 로라 한 사람의 말을 따르면 마닐라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는 매일 밤마다 일본군인에게 여성이 강간당했다고 한다. 로라의 집이 주둔지로 징용되었다는 예도 있고 그 밖에 위안부들을 수용하는데 터널이 이용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로라들이 위안부로서 감금되었던 기간은 3일간에서 1년 이상으로 로라에 따라 다양하였다. 4개월 이상 감금되었던 로라들이 25%, 3개월간이 17%, 1개월간이 16%였다. 로라들 전원은 감금 기간중에 강간을 당했다. 비자야스(Visayas)에 사는 어느 로라는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인들에게 가족이 심문을 받고 있는 동안에 7명의 일본병에게 강간당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7일간 밤마다 3명에서 5명의 일본군인이 그녀를 강간했다고 한다. 마닐라에 사는 로라 한 사람은 구속되어 1개월에 걸쳐 강간을 계속당했고 6-7개월간에 주둔지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이 동안에는 주에 3일 정도로 3명 이상의 병사가 와서 그녀를 차례로 강간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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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헨손 (Rosa Henson)씨의 경우
마리아 로사 헨손씨는 1927년 12월 5일 필리핀의 마닐라 근교 파사이(Pasay)에서 태어났습니다. 대지주인 아버지와 그의 가정부였던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였습니다. 1942년 2월 그녀는 일본군인에게 강간당하였습니다 그 때 그녀는 집에서 쓸 땔감을 주우러 숙부와 이웃 사람들과 함께나갔다가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일본군인 세 명에게 잡혀 강간당하였습니다. 그녀는 2주 후에도 장교에게 잡혀 다시 강간당하였습니다. 그녀는 일본군에게 심한 분노를 느껴, 항일 인민군, 후쿠발라합(HUKBALAHAP)에 참가하였습니다. 1년간 활동한 후, 1943년 4월 엔젤레스(Anheles)시 교외의 검문소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당하여 사령부로 끌려가 거기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 받았습니다.
로사 헨손씨는 병사로 쓰이던 병원으로 연행되었습니다(필리핀 전 위안부를 위한 변호사 위원회). 여기에서도 헨손씨외에 여성 6명이 일본군인들에게 성행위를 강요당하였습니다. 3개월 후 헨손씨는 원래 정미소였던 다른 위안소로 이동되었습니다. 일본군에게 협력하고 있던 필리핀인으로부터 일본군인을 위해 세탁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여 헨손씨와 다른 몇 사람의 젊은 여성들은 세탁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 필리핀인 협력자에게 이끌려 2층으로 지어진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3명의 일본군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약 1년 간 감금되었습니다. 낮에는 세탁을 하고 밤이 되면 강간당한 것입니다.(로사 헨손씨의 증언 기록은 여기로)
로사 헨손씨는 1944년 1월 게릴라에게 구출되었습니다. 연합국의 상륙으로 필리핀은 일본군의 점령상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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