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소가 일본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처음으로 개설된 것은 중국에서 전쟁중이었습니다. 1931년(쇼와 6년) 만주(満州)사변 때의 군 자료를 보면, 민간업자가 군대 주둔지에 장병을 상대로 한 점포를 열었으나, 위안부라는 말은 아직 없었고, 군대 자체의 움직임도 소극적이었습니다.
다음 해 제1차 상하이사변으로 전쟁이 상하이까지 확대되자, 파견된 해군 육전대 부대는 최초의 위안소를 상하이에 개소하였습니다. 위안소의 수는 1937년(쇼와 12년) 일중 전쟁 개시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육군에서 위안소를 추진한 이는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였다고 합니다.
그 동기는 점령지에서 빈발한 중국인 여성에 대한 일본군인들의 강간 사건으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방지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데 있었습니다. 또 장병이 성병에 걸려, 병력이 저하되는 것도 막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중국인 여성과의 접촉으로 군의 기밀이 새나가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 자료 제1 전장 회상편"1970년, 302~303쪽
예전의 전쟁 시대에는 위안부 등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안 창설자이다. 쇼와 7년(1932년) 상하이 사변 때 두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하였기에 파견군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같은 지역 해군을 본떠, 나가사키현(長崎県) 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렀고, 그 후 전혀 강간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기뻐하였다.
현재 각 병단은 거의 모두 위안부단을 수행하여 병참의 일 분대가 된 형태다. 제6사단 같은 부대는 위안부단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강간죄가 끊이지 않는 상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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