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념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 여성 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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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위안소와 위안부 >위안부란-태평양전쟁과 위안소의 확대

 위안부란-태평양전쟁과 위안소의 확대

 

1941년(쇼와 16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싱가폴,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를 공격하였습니다. 남방에 점령지가 확대됨에 따라 거기에도 군 위안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국면에서 남방 점령지 위안소의 여성을 확보하는 것에 (여성확보에) 대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 듯합니다. 1942년(쇼와 17년)1월 14일자 외무대신의 회답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도항자에 대해서는 [여권을 발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군의 증명서에 의거하여 [군용선으로] 도항하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외무성, 내무성, 경찰도 관여하지 못하는 곳에서 남방 점령지에 위안부 파견은 완전하게 군이 직접적으로 장악한 듯합니다.

1942년(쇼와 17년) 2월 말 또는 3월 초, 남방 총군으로부터 보르네오 행 "위안토인 50명을 될 수 있는한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대만군(대만 주둔 일본군)사령관에게 왔습니다. 이에 대만 사령관의 명령으로 헌병이 조사하여 3인의 경영자를 선정하였습니다. 3인의 경영자는 여성을 모집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이 건과 관련해서 6월에 "특종위안부 50명"에 대하여 현지 도착 후 "인원 부족"하여, 또 "일을 견디지 못한 자"가 나와, 20명을 증파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대만군으로부터 육군성에 보고가 있었습니다.

남방(南方)파견도항자에 관한 건

마찬가지로 남방총국에서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에도 조선인 여성을 위안부로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미군의 자료에 따르면 1942년(쇼와 17년)5월에 버마에서 '위안 서비스'를 위한 여성을 모집하려고 경성(지금의 서울, 이하 같음)의 육군사령부가 업자를 선정하여 타진하였는데 업자가 응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이때 조선에서 출발한 조선인 여성은 703명이었습니다. 조선군은 업자를 선정하여 모집을 시킨 듯합니다.

경성에서 요리점을 경영하던 조선인 부부가 헌병사령부의 타진에 응하여 이 일을 맡아 20명의 조선인 여성을 권유한 사례가 알려졌있습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300엔에서 1,000엔을 주고 사들었다", 여성들은 그들의 "단독 재산"이 되었다고 합니다만, 이는 그녀들을 선금을 주는 것으로 얽맸다는 것일 겁니다.여성들이 이야기하는 바로는 모집 때의 나이는 17세 1명, 18세 3명, 19세 7명, 20세 1명, 23세 이상 8명, 즉 20명 중 12명이 21세 미만입니다. 1938년에 일본 국내에서 모집할 때 경보국의 조건이 지켜지지 않았음은 확실합니다.

이 여성들에게 '위안부'를 구하고 있다는 명확한 설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성들의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 전시 정보국 심리작전반 보고서 49호에서 "자료집성(資料集成)"5권, 203쪽

"이 '역무(일)'의 성격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병원에 부상병을 문병하고, 붕대를 감거나 일반적으로 병사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과 관련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들 업자가 했던 권유 설명은 많은 돈을 벌어 가족의 부채를 갚을 좋은 기회라든가, 어렵지 않는 일이며 새로운 땅 싱가포르에서 새 생활을 기대할 수 있다는 등이었다. 이러한 거짓 설명으로 많은 처녀들이 외국 일에 응모하여 수백 엔의 선금을 받았다."

이는 업자에게 속은 것으로 자기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에 해당합니다.

위의 자료를 보면 태평양 전쟁 때의 조선, 대만에서 하였던 위안부 조달은 남방군의 요청을 받은 조선군, 대만군이 주체가 되었고, 헌병이 업자를 선정하고 업자가 모집한 여성들을 군용선에 실어 보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일본에서의 위안부 조달도 종래와 같은 형태로 계속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더욱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그 지역의 여성도 위안부로 종사하도록 강요 당하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구라사와 아이코(倉沢愛子)씨의 연구에 의하면 거주지의 구장이나 인조(隣組, 반)의 조장을 통해서 모집이 이루어진 듯합니다. 점령군의 뜻을 받아들인 촌 당국의 요청이라는 형태 속에는 자기의 의사에 반하여 소집 당한 사례도 적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용소에 갇혀 있던 네덜란드 여성을 끌어내어 위안소에 보내는 일이 행해졌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순수하게 강제 연행된 여성은 전체의 3분의 1에서 5분의 1 이었다고 합니다. 스마랑(Semarang)의 사례는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1명의 일본인 장교가 처형되었습니다.

이처럼 도시부나 군 주둔지에 만들어진 업자가 경영하는 위안소에 보내져 위안부가 된 사람들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전선의 부대(원)가 농촌 여성들을 강간하고 부대 숙소로 연행하여 옥내에 일정 기간 감금해 두고 강간을 계속한 사례가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가장 심한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도 위안부 피해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특히 이런 형태가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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