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념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 여성 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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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위안소와 위안부 >인도네시아
 
 위안부로 내몰린 여성들-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1942년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였습니다. 이 땅은 네덜란드령 식민지였기에 인도네시아인 가운데에는 일본군의 점령에 호의를 보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서도 각지에 위안소를 세웠습니다.

먼저 가장 큰 섬 수마트라(Sumatra)에는 북부의 블라완(Belawan)에 위안소가 있고, 인도네시아인 2명과 중국인 6명의 여성이 있었다는 진술이 있습니다. 자바섬에는 바타비아(Batavia)시(현재 자카르타)에 1942년 8월 제6 위안소가 개설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여기서는 조선인 위안부 7명이 있었습니다. 위안소는 6곳이 있었다는 셈이 됩니다. 중부의 스마랑에는 1944년에 4채의 위안소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곳이 스마랑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입니다. 가까운 문티란에도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서부의 수라바야(Surabaya)에는 3채의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셀레베스(Celebes) 섬에는, 1945년에 네덜란드군법회의의 요청으로 일본군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머캐서 시내에 3채, 섬 전체에 21채의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시내의 3채에는 여성 수가 20, 30, 40명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나머지 각 18곳의 위안소는 위안부가 10명 이하였으나 모두 인도네시아 여성뿐이었습니다. 보르네오 섬에는 1942년에 대만에서 70명의 위안부가 보내졌습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이를 단순히 합하더라도 40개 가량의 위안소가 있던 셈입니다.

이처럼 위안소에는 인도네시아인 여성이 많이 보내졌습니다. 구라사와 아이코(倉沢愛子)씨의 연구에 의하면 당초 매춘을 생업으로 한 여성들만이 보내졌습니다. 이윽고 일반 여성들이 보내졌습니다. 대개는 거주지의 구장이나 인조(隣組)의 조장을 통해서 모집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의 권력관계로 봐서 주민은 마을의 관리나 장로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거의 강제에 가까운 형태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반강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라고 합니다.

또, 구라사와씨의 연구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에서도 부대가 독자적으로 여성을 강제로 연행하여 자신들의 주둔지에 위안소 같은 것을 만든 예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서자바 지구에 많이 있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마을에서 시내로 일하러 나온 여성이 돌아가는 길에 공격을 당한 사례, 부모가 일하러 나가고 혼자서 집을 보다가 끌려간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준위안부(準慰安婦)'의 경우, 건강관리의 최소한의 조치도 없고, 피임하기 위한 콘돔도 없었으며 어떤 보수도 지급되지 않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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