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바라와 제4 또는 제6의 수용소에서 연행된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여기에서는 1944년 2월23일, 수용소 가운데 마당에 17세에서 28세까지의 여성을 줄서게 하고, 1명씩 수용소 사무소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다음 날인 24일, 20명이 사무소로 불려갔습니다. 그 후, 2월26일, 17명이 선발되어, 스마랑 시내 건물로 끌려가 동의서에 서명을 강요 당하였습니다. 동의서는 일본어로 쓰여 있어서 서명한 사람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할마헤라 수용소에서는 11명이 연행되어 왔으나 3명이 되돌려 보내졌습니다. 겐당간(Gendungan) 수용소에서는 나이든 여성들이 지원했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선발되는 것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약 35명의 여성은 2월26일 또는 그 2~3일 후, 스마랑 시내의 4 곳의 위안소로 보내졌습니다. 그것은 히노마루, 세이운소(青雲荘, 또는 후타바소(双葉荘), 스마랑클럽, 장교클럽 4곳입니다.
이와 같은 수용소 외에는 네덜란드인측이 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연행되는 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스마랑 사건은 도쿄에서 수용소를 시찰하러 온 장교가 네덜란드인의 호소를 듣고 여성들이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을 보고하여 군 상층부가 알게 되었습니다. 자카르타의 군사령부 명령으로 위안소는 영업개시 2개월만에 폐쇄되어 여성들은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안소 몇 군데는 그 후 혼혈여성을 써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재개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1943년 12월 내지 1944년 1월에는 같은 중부 자바의 문티란(Muntilan) 여자수용소에서도 일본군 관계자는 마게랑(Magelang)에 있는 위안소에 여성을 모으러 나섰습니다. 수용소의 네덜란드인 리더에게 바에서 일하는데 알맞는 젊은 아가씨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시켰습니다. 1월25일, 일본인은 이 명단의 여성들을 모아 신체 검사를 하고 15명을 선발하여 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측이 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일본측은 이들을 대신할 지원자를 내 놓으라고 하여, 그 결과 과거 매춘부로 일컬어지는 여성들이 지원하였습니다. 재선발이 이루어져 13명이 위안소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전후, 수용소의 네덜란드인을 강제적으로 위안소에 연행하였던 일본군 장교들은 BC급 전범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1948년 2월14일 바타비야(Batavia) 임시군법회의는 스마랑 위안부사건의 피고 13명 가운데 오카다 육군소좌에게 사형을, 11명에게 최고 20년, 최저 2년의 금고형을 선고하였습니다. 문티란 사례는 검찰측이 소추하려 하였습니다만, 성공하지 못하고 불문에 부쳐졌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1993년에 "일본점령하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네덜란드인 여성에 대한 강제매춘에 관한 네덜란드정부 소장문서 조사보고"를 냈습니다. (전문은 여기로)이
보고에 의하면 일본군의 위안소에서 일하였던 네덜란드 여성은 200명에서 300명에
이르지만 이 가운데 65명이 매춘을 강요 당하였다는 것은 "절대로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